<대구응급의료 사건 재발방지를 위한 대한응급의학회의 제안>
작년 말 장중첩증이 의심되던 4살 여자 아이가 응급 진료를 받지 못하고 병원을 전전하다가 상태가 악화돼 끝내 사망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새해 첫날, 또 다시 같은 지역에서 뇌출혈 환자가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다니다 상태가 악화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돌이켜보면 이번 사건들은 그동안 우리나라 응급의료체계에 누적되어 온 문제점들이 만들어낸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효율적인 응급의료체계가 뒷받침되었다면 비극적 결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응급의료에 종사하고 있는 전문의사단체로서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통한 마음과 함께, 무엇보다도 환자의 가족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이번 사건은 대구라는 한 지역에서 연속해서 발생한 사건이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다른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이에 전문단체인 대한응급의학회에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게 된 배경과 함께 개선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응급실을 책임지고 있는 응급의학전문의의 부족과 관리 소홀, 응급환자를 적절한 응급처치나 이송중의 안전확보 장치 없이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여도 큰 문제가 안 된다는 의료진들의 잘못된 관행, 적자 운영을 핑계로 응급실의 질적 수준 유지에 무관심해 왔던 병원 집행부, 그리고 응급실 운영에 대한 법적 제도적 장치의 미비 등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결과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 많은 전문의들이 있지만 전문의들이 응급환자의 진료를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응급환자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해결을 위해 분∙초를 다투는 특성상 가장 경험많고 지식이 많은 전문의가 진료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대부분 의사들이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면 응급실 진료는 전공의들에게 위임하고 외래진료 등에 치중하고 있다. 응급환자 진료는 업무의 과중함, 의료사고의 위험성 등이 일반외래 환자보다 월등히 높으나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즉, 위험하고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지만 덜 위험하고 덜 힘드는 외래환자를 진료하는 것이 더 큰 보상을 받는 구조에서는 응급환자 진료를 기피하도록 유도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의사에게 히포크라테스 정신의 강요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병원 경영진 입장에서도 응급환자를 많이 진료하면 진료할 수록 적자가 발생하는 응급실에 대하여 전문의 배치 등의 추가 투자를 결정할 이유가 없어 응급실의 질적 수준 향상이나 병상부족, 과밀화 현상을 병원전체 차원에서 해결하기 보다는 응급실 차원의 미봉책만 마련하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응급환자의 이송시 취해야 할 법적절차가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료진들이 이러한 법적 조항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과거의 관행에 의해 응급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전원하는 것이 문제이다. 환자들의 입장에서는 응급상황 발생시 적절한 의료기관을 선택할 수 없고 119구급대에서는 민원을 방지하기 위해 환자나 보호자가 원하는 병원으로 환자를 후송하게 되어 일부 병원의 응급실로 환자가 집중된다. 응급실이 만원이 되어 응급실의 수용능력을 초과하게 되면, 환자들은 진료를 받기 위해 오랜 시간을 대기하여야 하고 무엇보다도 중증 응급환자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다른 병원으로 재이송되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응급진료에 대한 불만이 야기되고 응급실 근무 의료진의 피로도를 높여 의료진의 응급실 근무를 기피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660명의 응급의학전문의가 응급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는 전국 460여개 응급의료기관으로 나누어보면 1개 기관에 평균 1.4명이 근무하는 것으로, 응급의료기관 당 전문의 6.2명이 근무하는 미국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숫자이다. 전국적인 분포에 있어서도 수도권과 대도시에 전문의들이 편중되어, 전국 93개 시・군에는 응급의학전문의가 한 명도 없는 실정이다. 또한 응급의학전문의의 응급처치가 이루어진 후 각 임상과의 진료가 필요한 경우에 진료에 참여하는 임상과들 중 힘든 업무로 잘 알려진 외과, 흉부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등에서 전공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응급실 진료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해당 임상과의 전공의 인력 부족 현상은 응급 진료의 질적 수준 저하는 물론, 해당과의 인력을 상회하는 환자들은 다른 병원으로 이송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이번 대구 사건을 계기로 문제점이 드러난 1339 응급의료정보센터는 병상정보 제공, 질병상담, 병원 및 약국 안내, 일반인대상 응급처치교육 등의 많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병원간 환자 이송시 병상 및 의료진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전담 인력이 없는 실정이다. 또한 국민이나 의료진들에 대한 홍보가 부족했고 의료기관들의 협조가 불충분하여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119와 정보센터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119구급대의 이용이 저조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응급의료체계 구성에 필요한 모든 조직은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의 효율적인 운영미비, 각 조직간에 협력미비 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한응급의학회는 자체적인 뼈저린 반성과 함께, 이번 대구 사건을 우리나라의 응급의료가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유사 사례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응급의료를 일차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응급의학과 의사들의 남다른 각오와 결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응급의학과 의사들의 보다 자기희생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둘째, 발생된 두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초래하는데 관련된 모든 요인들을 세밀하고 체계적으로 분석한 ‘백서’를 발간하는 것이다. 관련된 모든 요인들을 치밀하게 조사한 보고서는 현재의 응급의료체계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되고, 반성의 초석이 되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할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응급의료의 관리책임을 맡고있는 보건복지부는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담보할 수 있는 응급의료체계의 설계를 백지상태에서 다시 하여야 할 것이다. 의료현장에서 응급진료를 외면할 수 밖에 없는 제도하에서 단지 이번 사건과 관련된 병원이나 의료진의 처벌이라는 미봉책만으로는 유사사건의 재발을 방지할 수 없다. 셋째, 유사 사건의 방지를 위해서 정부, 학계,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상설 위원회를 설치하여 응급의료전달체계의 현황을 파악하고 문제점들에 대한 선제적 조정이 가능한 체계를 구축하도록 하여야 한다. 넷째, 이러한 사업에 활용될 재원의 투명한 조달과 운영을 위하여 중앙정부 차원에서 국민들의 귀중한 세금으로 조성된 응급의료기금의 적절한 배분을 담보할 ‘응급의료기금 운영사업단’을 신설하여 운영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노력들이 효과적으로 모두 함께 수행될 때만이 누적되어온 응급의료체계와 응급의료센터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G20 국가 위상에 걸맞은 응급의료체계를 구축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친 환자와 가족 분들께 다시 한번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항상 믿고 찾아야 할 응급의료에 대해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하여 국민 여러분들에 대한 송구스런 마음으로 국민들이 만족할 응급의료체계 구축에 전문단체로서의 막중한 사명을 느끼고 책임을 다 할 것을 약속드린다.
대한응급의학회
회 장 조 남 수
이사장 서 길 준